정보 접근성은 지식정보 격차 해소를 위한 디딤돌이다. 누구나 정보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다면, 정보를 얻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불평등과 후진성은 조금씩 줄어들 게다. 생명과 직결된 건강 정보라면 한발 더 나간다. 단순히 접근성이 보장돼야 할 뿐 아니라, 그 정보가 믿을 만 해야 할 테다. 심사를 거쳐 검증된 논문 정보에 쉽게 접근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헌데 생각해볼 일이다. 생명과 직결된 의학·건강 정보란 게 만국 공통 정보일까. 지역이나 습성, 기후나 풍토에 따라 발생하는 질병이 다르고, 쓰는 약도 달라지게 마련 아닌가. 그러니 이미 공개된 의학 논문을 널리 공유하는 일 못지 않게, 지역별로 그에 맞는 의학 정보가 생산되는 게 중요하다. 서정욱 교수(서울대학교 의과대학)가 이른바 ‘오픈 액세스’ 운동을 시작하게 된 이유다.

“대개 의학 자료를 검색할 때 미국 국립의학도서관 인덱스(펍메드, PubMed)를 주로 이용하는데요. 펍메드는 선진국 유명 잡지들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한국 잡지도 최근에야 15개 정도 제공되고 있지만 베트남이나 라오스, 캄보디아 같은 저개발국가 자료는 아예 없는 게 현실입니다. 건강 지식 정보는 미국이나 유럽같은 선진국 중심으로 생산되는 반면, 소비는 주로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 지역 저개발 국가에서 많이 이뤄지고 있죠. 그래서 선진국 중심이 아닌, 지역별 의학 정보와 이를 묶은 글로벌 인덱스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죠.”

(사진=정혜윤)

서정욱 교수는 2005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세계보건기구(WHO) 국제회의에 참석했다가 오픈 액세스 운동의 중요성에 눈을 떴다. “그 땐 일반인 자격으로 처음 참가했는데, 의학정보 색인 프로젝트 소식을 듣고 우리나라에 꼭 필요한 운동이라고 생각했어요. 곧바로 WHO 서태평양 본부가 있는 마닐라로 날아가 한 달동안 현지 정부기관을 방문해 필리핀과 한국 의학 데이터베이스 통합을 제안했죠. 몇 번을 설득하고 문제를 제거하는 과정을 거쳐 드디어 학술정보 공유 협약을 맺었어요. 누가 돈 준 것도 아닌데 겨울방학을 온통 쏟아부었죠, 허허.”

서 교수는 “의학지식 정보는 접근성 격차가 아니라 생산성 격차가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아무리 좋은 의학정보가 있더라도, 현지에 맞는 의학정보가 생산되고 노출되지 않으면 소용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러자면 저개발국가에서 의학 논문을 활발해 생산할 수 있도록 돕고, 이렇게 발표된 논문이 색인되고 검색에 노출될 수 있도록 하는 게 관건이다. 논문이란 자주 노출되고 공유돼야 인용 기회도 늘어나고, 논문 가치를 평가하는 ‘영향력 지수’(Impact Factor)도 덩달아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러자면 아태지역에 흩어진 의학 정보들을 모아 DB화하고, 통합 검색 기능을 제공해야 하는데요. 일본과 중국쪽에 협력을 제안했어요. 각자 언어가 다르고 색인 구조도 제각각인 탓에 통합이 쉽지 않았어요. 초록을 영어로 통일하고, 한·중·일을 오가며 10여차례 회의를 거친 끝에 올해 5월7일 마침내 통합 DB 시스템을 띄우게 된 겁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서태평양지역 의학정보 인덱스(WPRIM)는 한·중·일을 포함해 서태평양 지역 의학 논문들을 한데 검색할 수 있는 통합 시스템이다. 31개 나라 가운데 9곳 나라가 우선 참여했다. 2010년 6월 현재 414종류 의학 학술지가 검색 기반으로 제공되고 있다.

더 흥미로운 건, WPRIM이 ‘코 리아메드‘를 기반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코리아메드는 대한의학학술지편집인협의회가 주축이 돼 운영하는 의학정보 통합검색 시스템이다. 서정욱 교수를 비롯해 의사이자 학술지 편집인으로 활동하는 국내 의학 인사들이 1990년대 중반부터 의학 정보 DB의 중요성을 깨닫고 시스템을 만들어 운영해왔다. 저작권자인 학술지 편집인들이 주도한 덕분에 남들보다 일찍 개방된 접근성, ‘오픈 액세스’ 시스템을 만들 수 있었던 게다. 중국과 일본이 자존심을 접고 코리아메드 시스템을 WPRIM에 접목하게 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학술 정보에 있어선 저작권이 소유보다는 공유 개념이 더 강한 편입니다. 학술 논문이란 내가 손에 쥐고 있는 게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읽게끔 하고픈 정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 논문을 읽고 인용할 수록, 학자로서의 가치와 인격도 올라가는 것이죠. 그런 면에서 학술 정보의 저작권은 인격권에 가까운 셈입니다.”

오픈 액세스는 말 그대로 인터넷 시대에 누구나 접근 가능하도록 지식 정보를 개방하자는 운동이다. 지식을 조건없이 무료로 개방하자는 ‘프리 액세스’와는 구분된다. 쉽게 접근하고 널리 이용하도록 만들되, 가치에 적합한 대가를 받자는 얘기다. 그래서 서정욱 교수는 지식 정보를 많이 모으고, 꾸준히 새로운 정보로 갱신하고, 합당한 가치에 맞게 널리 소비되도록 하는 3가지 요소가 오픈 액세스 운동의 핵심이라고 지적한다.

“동양에선 지식은 남에게 베풀고 나누는 것이란 공자의 사상이 오래전부터 이어져왔습니다. 서양에선 지식이란 돈 주고 사는 개념이죠. 우리나라 학술지는 처음부터 팔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무료로 만들다보니 질적 저하가 문제가 되고, 배포에 돈이 들다보니 구독료를 받아야겠다는 갈등이 생긴 거죠. 그 와중에 인터넷이 나오고 오픈 액세스란 개념이 등장하면서 이 갈등을 쉽게 풀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입니다.”

하지만 마냥 열어주는 게 반드시 정답일까. 학술 정보를 누구에게나 공개하면 여럿이 읽고 인용하지만, 그게 꼭 학자 권위와 연결되는 건 아니다. ‘네이처’나 ‘사이언스’처럼 권위 있는 학술지는 저작권을 엄격히 단속하고 심사도 까다롭지만, 그 곧에 한 번 실리면 학자로서 명성이 치솟는다. 오픈 액세스 저널은 문턱이 상대적으로 낮지만, 자칫 발생할 수 있는 논문의 질적 저하를 끊임없이 경계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네이처’ 같은 권위 있는 잡지는 저자가 아닌 독자에게 비싼 돈을 부담하도록 하는 반면, 오픈 액세스 저널은 저자에게 출판 비용 일부를 짐지운다. ‘개방’과 ‘폐쇄’ 사이의 간극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대학 도서관마다 저널 구입비가 가파르게 치솟고 있어요. 20년 전과 비교해 단행본 구입비는 1.8배 오른 반면, 학술지 구입비는 4.7배나 늘어났죠. ‘네이처’나 ‘서큘레이션 리서치’ 같은 다국적 출판기업이 구독 가격을 무리하게 올려도, 도서관은 울며 겨자먹기로 구입할 수 밖에 없어요. 오픈 액세스 저널은 출판비를 저자가 일부 부담하는 대신, 좋은 논문이 널리 검색되고 학자들이 더 좋은 연구에 매진하도록 동인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고자 합니다. 남들이 많이 인용할 거라고 생각하면, 논문에 거짓말을 못하고 진실된 얘기만 하지 않겠어요, 하하”

서정욱 교수는 서울대학교병원 병리과장과 서울대 의학도서관장을 맡고 있으며, 대한의학학술지편집인협의회 국제위원회 위원장과 아시아태평양 국제학술지편집인협의회 사무총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오픈 액세스 운동을 계기로 2008년부터 크리에이티브 커먼즈(CC)와 인연을 맺고, 현재 사단법인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이사로 의학 지식정보에 CCL을 보급하는 일에도 앞장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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