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 PC 닦고 고치던 날…‘착한 순환’을 만나다
주말을 앞둔 6월5일,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남양주시 도농동에 있는 한 창고 건물 앞에 모여들었다. 모두들 정장 대신 작업복을 걸치고, 펜을 놓고 장갑을 꼈다. 저마다 가슴에 단 명찰이 눈에 띈다. ‘딜로이트 안진회계법인’(이하 딜로이트). 평소같으면 회계장부와 PC 모니터에 파묻혀 있을 시간인데, 왜 이들은 낯선 차림으로 이 곳에 모여들었을까.
이들이 사무실 대신 들른 곳은 한국컴퓨터재생센터(이하 재생센터)다. 낡은 PC들을 모아 닦고, 고치고, 다듬어 쓸 만 한 재생PC로 되살리는 곳이다. 딜로이트 임직원 30여명은 오늘 이 곳에서 조금 특별한 일을 하기로 했다. 키보드와 펜 대신 헝겊과 수리 도구를 들고 낡은 PC를 청소하고 재생하는 작업을 하기로 한 것.
새삼스런 일은 아니다. 딜로이트는 이맘때면 ‘임팩트 데이’(Impact Day)를 연다. 해마다 6월 셋쨋주를 정해 나라별로 나눔과 봉사를 실천하는 행사다. 벌써 올해가 10회째. 전세계 140곳에 이르는 딜로이트 지사 가운데 57개국 정도가 참여하고 있으며, 참여 인원은 5만여명에 이른다.
한국 딜로이트는 올해 처음 임팩트 데이에 참여했다. 2천여명에 이르는 직원들 가운데 스스로 나선 350여명이 무리를 나눠 10여곳으로 봉사활동을 나갔다. 이 가운데 컨설턴트들이 주축이 된 30여명이 오늘 남양주에 있는 재생센터로 발품을 팔러 나왔다. 6월 하늘은 맑았고, 햇살도 따뜻했다.
연간 1만5천대 PC 재생…주요 복지지설에 기증도
오전 10시. 저마다 마스크를 쓰고 장갑을 끼고 움직임이 부산하다. 150평 남짓한 창고 안이 비좁은 느낌이다. R&D팀 최소영 대리는 헝겊을 들고 PC 본체에 묻은 때와 먼지를 닦아내느라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않았다. 테이프를 손에 든 컨설팅팀 서병도 부사장과 총무부 강계영 과장은 청소가 끝난 PC를 부지런히 포장했다. 작업을 마친 PC 박스가 금세 한켠에 수북히 쌓였다.
이들은 오늘 하루 청소와 수리, 포장까지 마친 PC를 직접 들고 남양주지역 9곳 아동복지시설을 돌며 기부한다. 행사 진행을 돕던 전지혜 전략기획부 사원은 “지식근로자들이 많은 회사 특성에 맞춰, 임팩트 데이 활동 외에도 정기적으로 자활센터 등을 찾아 무료 컨설팅 활동을 펼치고 있다”며 “예전엔 생일을 맞은 직원들 집으로 케익을 보내주곤 했는데, 요즘은 사회적기업이 만든 쿠키를 보내주는 등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활동들을 많이 찾아 진행하고 있다”고 뿌듯해했다.
딜로이트 임직원들이 찾은 재생센터 또한 노동부가 인증한 사회적기업이다. 10여년 동안 PC 대여 사업을 해온 구자덕(42) 대표가 지난해 설립했다. 이 곳에선 먼지 쌓인 낡은 PC도 조금만 손길을 거치면 거짓말처럼 그럴듯한 PC로 재탄생한다. 구자덕 대표는 “PC 구매 주기가 짧아지면서 쓸 만 한 PC들이 창고에 처박혀 있다 폐기되는 것이 안타까웠다”고 이 일을 시작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일부 기업용 PC 유지보수 업체들이 필요할 때마다 PC를 수리해주는 사례는 있지만, 중고 PC를 재활용하는 업체로는 국내에서 거의 유일하다”고 구자덕 대표는 어깨를 으쓱했다.
재생센터는 PC를 재활용할 뿐 아니라, 필요한 곳에 기증하기도 한다. PC 자원 낭비도 막고 좋은 일도 하니, 도랑 치고 가재 잡는 일이다. 사회적기업답게 직원의 30% 이상은 취업 취약계층을 의무 고용한다. 이같은 사회적 일자리에 대해선 정부가 임금 일부를 보조한다. 재생센터 직원 26명 가운데 15명이 이런 식으로 사회적 일자리로 인정받은 사람들이다.
이 곳에서 1년에 생산하는 중고 PC는 대략 1만5천여대다. 국내에서 1년에 쏟아지는 중고 PC가 300만대. 이 가운데 재생 PC로 거듭나는 비율은 7~8%에 불과하다. 대개는 낡은 PC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몰라 방치하다 폐기한다고 한다. 재생센터처럼 쓸모없어 보이는 PC에 생명을 다시 불어넣고 좋은 일에도 보태는 곳이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이유다.
기업은 낡은 PC를 버리자니 아깝고 쌓아두자니 번거롭다. 이런 PC들은 대개 손질을 거쳐 저개발국가나 저소득층, NGO 등에 기부된다. 그러려면 재생센터처럼 낡은 PC를 고치고 다듬는 곳을 거쳐야 한다. 지난해엔 SK텔레콤이 중고 PC를 기부하기 전에 재생센터에서 새단장을 마쳤다. 올해엔 굿모닝신한증권이 라오스에 중고 PC 500를 기부하는 일을 재생센터가 맡기도 했다.
중고 PC라고 해서 무시할 일이 아니다. 요즘 쏟아지는 중고 PC 사양은 대략 펜티엄4 2.8GHz에 메모리 512MB 정도. 고사양 멀티미디어·그래픽 작업까지야 무리겠지만, 고화질 동영상을 감상하거나 웹서핑, 문서작업을 하는 데는 전혀 무리가 없는 수준이다. 이같은 재생PC가 중고 가격으로 대략 10만원 선. 구자덕 대표는 “굳이 최신 사양 PC가 필요없는 영어학원같은 사업장에서 재생PC 구입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보안 문제도 걱정할 필요 없다. 구자덕 대표는 “기업들이 낡은 PC를 처분하거나 기부하길 두려워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PC 안에 담긴 기업 정보가 유출될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재생센터에선 국가정보원이 인증하는 데이터 안전 처리 방침을 따른다. 중고 PC가 입고되면 HDD를 분리한 다음, 정부가 인증한 HDD 데이터 제거 기기로 혹시 남아 있을 지 모르는 고객 정보를 안전하게 제거한다. 그런 다음 이 기기를 이용해 여러 대의 HDD에 운영체제와 SW들을 안전하게 설치한다.
그러니 일반 가정이나 소규모 사무실도 기왕이면 재생센터 문을 두드려봐도 좋겠다. 새 제품을 구입하면서 천덕꾸러기가 된 PC나 모니터가 누군가에겐 고마운 도우미가 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안 쓰는 PC나 주변기기를 보내면, 재생센터에선 택배비를 부담한다.
구자덕 대표는 “집이나 사무실에 쌓아뒀다 버릴 PC라면, 기왕이면 정부가 인증한 사회적기업에 보내주길 바란다”라며 “좋은 일에 힘을 보태고 자원 재활용에도 도움이 되니 일석이조 아닌가”라고 인식 전환을 당부했다.
기부용 정품 SW까지 탑재한 안심 PC
재생센터에서 만든 PC에는 모두 정품 윈도우나 SW가 깔려 있다. 주요 SW들은 마이크로소프트(이하 MS)가 사회공헌활동 차원에서 기부한다. MS는 MAR(Microsoft Authorized Refurbisher)란 제도를 전세계를 대상으로 운영하고 있다. 비영리단체나 공익을 위한 사업에 MS 주요 제품의 라이선스를 무료로 제공하는 제도다. MS쪽에선 최소한의 행정 비용으로 제품 1개당 5달러 정도만 받는다. 이를테면 윈도우나 오피스SW 정품을 5~6천원에 가져다 쓸 수 있는 셈이다.
재생센터에서 출고되는 PC들도 MAR 제도에 따라 정품을 탑재하고 있다. 이들 PC에는 MS 기부용 라이선스임을 표시하는 라벨이 붙어 있다. 이 라벨이 붙어 있는 PC는 MS 일반 정품처럼 똑같이 사후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이와 별도로 재생센터에선 자체 품질보증 라벨을 붙여 재생 PC에 대해서도 3개월까지 제품 보증을 책임지고 있다.
재생센터에 기부용 라이선스를 제공하고 있는 한국MS의 권찬 사회공헌담당 이사는 “재생센터 말고도 최근 2~3년동안 한국정보문화진흥원, 서울시 등과 협력해 공공기관이나 비영리단체에 기부용 라이선스 3만5천여개를 공급했다”며 “돈을 보태거나 자원봉사를 하는 단계를 넘어서, 기업이 가진 기술과 재능을 기부하고 선순환하는 일이 활성화되는 데 한국마이크로소프트도 힘을 보태고 싶다”며 구자덕 대표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졌다. 일손을 잠시 멈추고 흐르는 땀을 닦던 딜로이트 임직원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외쳤다. “자, 조금만 더 열심히 일하고 맛있게 식사들 합시다.” “얼른얼른 일하고 또 PC 갖다주러 가야죠.” 곱게 포장된 PC들이 조금 뒤면 차에 실려 이들을 기다리는 어린이들 곁으로 간다. 다시금 부산해지는 손놀림들을 뒤로 하고 혼자 창고를 나왔다. 바람은 시원했고, 가슴 한켠은 뜨뜻했다.













덧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