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이든, 난독증 환자든, 시력이 안 좋은 어르신이든 기기나 형식에 제약없이 읽을 수 있는 표준화된 디지털 도서를 하루빨리 제작·보급해야 하는데, 민간의 힘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헌데 정부에선 정말로 장애인들이 원하는 게 뭔지 잘 모르는 것 같아요. 계속 현실과 동떨어진 정책과 지원만 내놓으니, 휴~.”

육근해(49) 한국점자도서관 관장은 뜻깊은 컨퍼런스를 힘들게 주최하고도 표정이 밝지 않았다. 옆에서 얘기를 듣던 히로시 가와무라(62) DAISY 협회장이 웃으며 육 관장을 토닥였다. “그래도 한국은 초고속 네트워크가 잘 발달한 나라 아닙니까. 장애인들을 위한 디지털 책을 세계에서 가장 빨리 보급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추고 있어요.”

육근해 관장과 히로시 가와무라 협회장은 힘을 모아 6월3일부터 사흘동안 서울 올림픽 파크텔에서 ‘2009 DAISY로 여는 새 세상’ 컨퍼런스를 개최하고 있다. 용어도 낯설고 요란한 홍보도 없지만, 꽤나 뜻깊은 컨퍼런스다.

육근해 한국점자도서관장(왼쪽)과 히로시 가와무라 DAISY협회장.

이번 컨퍼런스에는 전세계 17개 나라에서 250여명이 참석했다. 시각장애인도 있고, 도서관협회 관계자도 곳곳에 보였다. 디지털 책을 좀 더 편리하게 보도록 돕는 보조기구도 한켠에서 전시되고 있다. 전세계 독서장애인들의 책 읽을 권리를 보장하고자 열리는 이같은 컨퍼런스는 국내에서 보기 드물다. 국립중앙도서관과 한국마이크로소프트 등이 컨퍼런스를 후원했다.

음성·텍스트·이미지 아우르는 디지털 국제 표준 문서형식

데이지(DAISY). ‘Digital Accessible Information System’의 줄임말이다. 우리나라에선 이를 ‘디지털 음성정보 시스템’이라 부른다. 한마디로, 책 읽기 어려운 시각장애인이나 약시, 난독증, 시력이 약한 노인 등을 위한 디지털 문서 표준 형식이다.

데이지는 단순히 목소리만을 디지털화하는 음성도서와 다르다. 기존 음성도서는 특정 단락이나 장을 찾아가기 어려울 뿐 아니라 이미지나 수학기호, 도표 등을 인식하기 어려운 단점이 있었다. 데이지는 디지털 음성파일과 함께 목차, 페이지 정보와 텍스트 등 책속 모든 정보를 통합 내장한 표준 형식이다. 시각장애인이나 눈이 어두운 노인들도 쉽게 페이지나 장, 단락을 찾아갈 수 있으며 복잡한 수학기호도 인식할 수 있어 독서에 큰 도움이 된다. 기존 점자도서나 음성도서의 단점을 모두 보완한 차세대 디지털 문서 형식인 셈이다. 지금은 저작권 문제로 텍스트는 빼고 음성파일과 목차, 페이지 정보만 저장하고 있다.

지난 1996년에는 지구촌에 데이지 형식을 보급하고자 글로벌 컨소시엄이 결성됐다. 히로시 가와무라씨는 당시 컨소시엄 결성을 주도하고 직접 협회장도 맡았다. 국내에선 육근해 관장이 운영하는 한국점자도서관이 첫 회원으로 등록했다. 이 인연을 시작으로 육 관장은 DAISY협회 이사를 맡았고, 내친김에 팔을 걷어붙여 이번 컨퍼런스를 유치했다.

“1996년에 데이지 기반 문서를 만들 수 있는 시스템을 처음 한국에 들여왔어요. 일부 점자도서관이 음성도서 형태로 책을 보급하거나 지역 복지관 자원봉사자들이 책을 일일이 녹음해 보급하던 시절이었죠. 그 때부터 한두 권씩 데이지 형식 도서를 만들고 SW를 무료로 보급하기 시작했어요. 2006년에는 데이지 저작 SW도 한국어로 개발해 보급했고요. 지금은 점자도서관이 소장한 책 2만5천여권 가운데 10%인 2500여권이 데이지 기반 도서로 보급되고 있어요. 하지만 아직도 장애인들이 이용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수준입니다.”

육근해 관장은 “읽기 불편하고 거동이 어려운 장애인들을 위해 온라인으로 손쉽게 접근·열람·대출할 수 있는 중앙집중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건 정부가 나서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라며 “데이지야말로 장애인 뿐 아니라 전세계 언어 장벽을 허물 수 있는 통합 표준 형식”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데이지는 전세계 50여개국 이상에서 표준 문서 형식으로 통용되고 있다. 한 권만 제작하면 국경을 넘어 50개 이상 나라에서 읽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선 PC에 데이지 포맷을 읽을 수 있는 전용 SW를 설치해야 한다. 전용 단말기를 구입하면 이동중에도 손쉽게 책을 내려받아 어디서든 읽을 수 있다.

단말기 비싸고 제작 오래 걸려 보급 어려움

데이지는 또한 독서장애인을 위한 문서 형식만은 아니다. 어학공부를 하려는 학생들이나 현지 언어를 모르는 외국인 거주자 등도 데이지 기반 문서를 학습도구나 독서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다. 글을 읽지 못하는 문맹인에게도 데이지 형식 문서는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유용한 도우미다.

하지만 데이지 기반 책을 보급하는 길은 아직도 가시덤불 투성이다. “데이지 전용 단말기는 가격이 50~70만원 수준으로 개인이 사기엔 부담스럽습니다. 일부 도서관에서 기기를 빌려주긴 하지만, 도서관 밖으로 가지고 나갈 수 없으니 사실상 실효성이 떨어져요. 그러니 상대적으로 저렴한 MP3플레이어를 사서 복지관에서 제공하는 MP3 음성도서를 읽으려들죠. 또 데이지 기반 책을 제작하는 시간도 오래 걸립니다. MP3 음성도서 만드는 시간보다 보통 3배 정도 걸려요. 그러니 비효율적이라는 이유로 정부에서도 보급에 팔을 걷어붙이려들지 않는 분위기죠.”

스펀지에 물이 스미듯 조금씩 변화의 기색이 보인다. “2006년에 LG상남도서관이 개원 10주년 기념으로 ‘책 읽어주는 도서관’이란 이름으로 데이지 방식 디지털 책 서비스를 시작했어요. 시각장애인들도 기대 이상이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고요. 지난해부터 정부쪽에서도 조금씩 반응을 보이는 분위기입니다. 이번 컨퍼런스에서도 문화부 관계자가 참석해서 국가 차원에서 적극 나설 뜻을 내비친 만큼, 앞으로 변화가 있겠죠.”

데이지 형식 디지털 책을 읽을 수 있는 단말기. 가격이 50만원 이상으로 개인이 구매하기엔 부담스런 수준이다.

전세계 주요 기업들도 데이지 보급을 거들고 나섰다. 마이크로소프트(MS)와 구글 등 내로라하는 IT기업들이 데이지 프로젝트를 후원하고 있다. MS는 2008년 1월, 데이지 컨소시엄과 함께 OOXML 문서를 데이지XML 형식으로 바꿔 저장할 수 있는 MS워드용 확장기능을 만들어 오픈소스로 공개했다. 이 확장기능 덕분에 OOXML 기반 MS워드 파일을 데이지 형식으로 변환하는 일이 한층 쉬워졌다. 육근해 관장은 “남들은 잘 모르겠지만, 데이지 컨소시엄 입장에선 이같은 확장기능이 혁신적인 일”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표준 따르는 e북 보급, 정부가 앞장서야

히로시 가와무라 협회장도 “예컨대 최근 문을 연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 도서관에서 데이지 형식 책을 제작해 보급한다면 전국 확산은 시간문제일 것”이라며 한국 정부가 좀더 데이지 보급에 적극 나서주길 당부했다. DAISY컨소시엄은 현재 음성과 텍스트, 이미지를 넘어 동영상 파일을 데이지 표준에 통합하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출판물에 대한 장애인 접근권을 보장하기 위해 세계지적재산권기구(WIPO)와 협력해 국제 조약도 만들고 있다.

장애가 e독서에 짐이 되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일은 이제 막 걸음마를 뗐다. 아직도 넘어야 할 과제는 산더미다. 육근해 관장의 하소연이 공허한 메아리로 끝나지 않길 바란다.

“장애인에게 제일 중요한 게 뭔지 아세요? 우리나라 모든 장애인을 포함한 국립장애인도서관을 만드는 겁니다. 전국 복지관과 점자도서관에 흩어진 컨텐트도 한데 모으고 지역과 대학 도서관도 네트워크로 묶는 것이죠. 정부에서 조정·관리·통제해 온라인 독서 환경을 만들어줘야 합니다. 여기에 표준 형식에 맞춰 디지털 책을 제작·보급하면 장애인들에게 정보접근권 기회도 제공하고, 이들이 정보습득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도록 돕는 길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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