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다. 책도 비껴갈 수 없다. 종이책은 여전히 건재하지만, 색다른 형태의 ‘책’들도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다. 이른바 디지털 책들이다.

디지털 책들은 말 그대로 종이책 내용을 디지털화한 책들이다. 이렇게 변환된 책 파일들은 PC나 휴대폰, 전용 단말기 등으로 읽을 수 있다. 휴대폰이나 게임기로 책을 읽는 풍경도 더 이상 낯설지 않다.

하지만 디지털 책은 출판업자에게 또다른 고민을 낳았다. 변화된 유통방식은 기회와 동시에 위협이다. 파피루스에 갇혀 있던 책이 디지털의 날개를 달고 새로운 금맥을 찾았지만, 그만큼 외부 위협도 커졌다. 주요 위협은 다름아닌 무한 복제와 통제 불가능한 유통 시스템이다.

20세기 초 발터 벤야민이 예견했던 기술복제시대는 서막에 불과했던가. 연극에서 영화, 회화에서 사진으로의 변화가 북경 나비의 날갯짓이었다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전환은 뉴욕의 폭풍이다. 북경 시대가 원본과 복제의 간극을 없앴다면, 뉴욕시에선 접근의 장벽까지 허물었다. 국경 없는 온라인 세상에선 누구나 책에 접근하고, 복제하고, 유통한다. 저작물 보호 기술(DRM)을 적용해도 임시방편일 뿐이다. 저작권법이 거북이 걸음으로 쫓아오는 동안, 사이버 책도둑들은 날로 발전하는 정보기술에 올라타고 불감증 환자마냥 거리낌없이 복제하고 유통한다.

DRM은 외피일 뿐이다. 출판업자들의 영혼을 잠식하는 건 잠재된 불안이다. 언제 복제될 지 모른다는 불안감, 일단 유통되면 브레이크 고장난 자동차처럼 통제할 수 없을 거란 불안감 말이다. 이는 실현되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이다. 고로, 출판업자를 떨게 하는 건 드러난 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위험이다.

이같은 이유로 온라인 사업자와 출판업자들은 오랫동안 책의 유통방식을 둘러싸고 파열음을 일으켰다. 출판업자들은 되도록 책이 종이속에 고이 갇혀 있길 바란다. 고전적인 방식으로 훔치지 않는 한, 책속 지식들은 쉽사리 도둑맞지 않는다.

반면, 온라인 사업자들은 책도 디지털 급류에 올라타고 너울너울 퍼지길 원한다. 종이책이 다양한 형태로 확대 재생산돼 새로운 창조물로 거듭나는 세상을 꿈꾼다.

그러다보니 분쟁도 늘고 논란도 커진다. 구글은 미국내 주요 도서관 책들을 검색할 수 있는 서비스를 내놓았다가 대형 출판사들과 2년동안 지루한 소송을 벌였다. 출판업자들이 저작권 침해를 이유로 서비스 중단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헌데 오늘(10월28일) 구글이 출판업자들과 합의를 했다는 소식을 발표했다. 주요 합의 내용은 ▲희귀 서적과 절판 서적을 온라인에서 검색하고 일부 내용을 볼 수 있도록 하고 ▲책에 대한 온라인 접근권을 구매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하고 ▲미국 대학과 주요 기관들이 보유한 장서에 대한 온라인 구독권을 제공하며 ▲미국 국공립 도서관과 대학 도서관에선 주요 서적 전문을 무료로 볼 수 있게 하며 ▲작가와 출판업자에겐 적절한 보상과 통제권을 부여한다는 내용이다. 독자들의 온라인 접근권을 확대하면서 저작권자와 출판업자에겐 적절한 사업 기회와 보상을 제공하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합의로 보인다.

비영리 독립기구를 통해 온라인 접근권과 저작권을 관리하는 점도 주목할 만 하다. 디지털 책 유통 문제도 거슬러올라가다보면 결국 밥그릇 문제로 수렴된다. 출판업자마다 이해관계가 다르고, 서비스 업자들의 생각도 저마다 다르다. 그러다보니 독자와 출판업자, 저작권을 사이에 두고 유통 마진을 취하려는 디지털 거간꾼까지 등장해 활개치고 있다. 이처럼 다양한 이해관계를 중재할 수 있는 비영리 독립기구는 이럴 때 합리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나는 출판업자들도 빨리 변화를 인정하고 흐름에 적극 올라타야 한다고 믿고 있다. 종이책은 살아남겠지만, 종이책만 살아남지는 않을 것이다. 종이책에만 매달려선 확대된 기회에 올라타지 못한다. 기회는 위험을 동반하게 마련이다. 정체되면 발전이란 없다. 구더기 무서워 장 담그기를 포기할 순 없는 노릇 아닌가.

적어도 공익적 목적에선 책이 적극적으로 디지털과 결합해 개방돼야 한다. 책과 디지털의 친화력은 상상 이상의 효과를 낳을 수 있다.

시각장애인은 공부가 어려운 게 아니라, 공부를 준비하는 일이 어렵고 험난하다. 매 학기 초, 수업 교재를 텍스트(txt) 파일로 변환하다보면 한 학기의 절반이 훌쩍 지나가버린다. PC 없이 공부하기 힘든 시대에 왜 시각장애인에겐 아날로그 방식의 학습만 강요하는지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얼마 전 시각장애인으로는 처음으로 사법시험을 통과한 최영 씨가 화제가 된 바 있다. 그는 복지단체 자원봉사자의 도움으로 주요 교재를 텍스트 파일로 변환해 공부했다. 최영 씨는 그런 점에서 행운아에 속한다. 복지사 도움을 받지 못하는 대부분의 시각장애인은 한두 동료의 ‘희생’으로 교재를 텍스트 파일로 변환해 공부한다.

심지어는 교재 저작권자인 교수가 텍스트 파일 배포를 허락해도 출판업자들은 모르쇠로 일관한다. 교재 파일이 무단 복제될까 두렵다는 것이 주된 이유다. 이런저런 이유에 가로막히다보면 책은 종이속에만 갇혀 있어야 할 운명인 것처럼 느껴진다.

국회 문화관광체육위원회 소속 한나라당 나경원 의원이 내놓은 국정감사 자료를 보자. 장애인들의 연평균 공공도서관 이용률은 전체 이용률의 0.16%에 불과하며, 전국 공공도서관 총 장서 중 시각장애인들이 접근할 수 있는 대체자료 비율은 전체 장서의 0.2%에 불과하다. 해마다 들어오는 신간 5만여종 가운데 대체자료로 변환되는 비율도 2% 미만이란다. ‘우리도 PC로 공부하고 싶다’는 시각장애인의 외침을 출판업자들은 언제까지 외면할 것인가.

미국 하버드대는 저작권자가 특별히 요청하지 않는 한, 논문을 인터넷에 자유롭게 공개하고 있다. 개인 재산임을 인정하지만, 논문이 지닌 공공재 성격에 더욱 무게를 두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들은 여전히 저작권을 갖고 논문을 자유롭게 저널에 게재하거나 유료로 판매할 수 있다. 하버드대학이 논문을 공개하기 때문에 ‘논문장사’를 하지 못한다는 소식은 아직까지 듣지 못했다.

우리나라 국회로 눈을 돌려보자. 지난해 8월, 이상민 당시 열린우리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저작권법 개정안은 시각장애인을 위해 저작물을 점자로 복제·배포할 수 있도록 한 지금의 저작권법에 ‘인쇄물 음성변환 출력기용 정보기록방식’을 추가하자고 제안했다. ‘인쇄물 음성변환 출력기’란 스크린 리더를 가리키며, 그 대표 기록방식은 ‘BBF’ 파일이다. BBF 파일은 용량이 커서 활용도가 떨어지고 값비싼 스크린 리더를 구입해야 쓸 수 있다.

이 법안은 올해 대표발의자만 김소남 한나라당 의원으로 바뀌었을 뿐, 2년째 똑같이 국회에서 심의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다. 시각장애인이 PC에서 손쉽게 쓸 수 있는 텍스트 파일로 저작물을 배포할 수 있도록 저작권법이 하루빨리 개정돼야 한다. ‘출판사업자는 장애인이 장애인이 아닌 사람과 동등하게 접근·이용할 수 있는 형태의 제작물 또는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장차법) 개정안 문구가 머쓱하지 않도록 말이다.

마음먹고 결단을 내려보면 어떨까. 제대로 공개해야 효과와 파장도 제대로 가늠해볼 수 있는 법이다. 신간이 어렵다면, 출간한 지 오래된 책들이라도 먼저 공개해볼 일이다. DRM을 적용해도 좋고, 되도록이면 날것 그대로 개방해도 되겠다. CCL같은 규약을 적용해봐도 좋겠다. 그래야 ‘사회적 복제방지장치’가 어느 정도 작동하고 있는지 제대로 실험해볼 수 있다.

사회적 안전망도 발맞춰 갖춰져야 한다. 책이 디지털에 제대로 용해되려면 출판업자와 저작권자의 잠재된 불안부터 해갈해야 한다. 보호돼야 할 저작물에 대해선 확실한 안전망을 구축할 수 있음을 믿게 해야 한다. 비영리 독립기구를 두고 체계적으로 디지털화된 저작물의 권리를 보호하는 한편, 굳이 꽁꽁 숨겨두지 않을 지식에 대해선 되도록 자유로운 날개를 달아주려는 노력을 함께해야 한다. 디지털 책을 출판하거나 공익적 목적으로 변환해 제공하는 출판업자에 대해선 정부가 제작비용을 일부 보전해주는 방안도 고려해봄직하다. 책과 디지털을 화해시킬 묘약은 신뢰와 안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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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Mannequin. CC-BY.(http://flickr.com/photos/mannequin-/2504818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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