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하면 되었다 싶더니 다시 비가 내렸다. 봄비는 지루하게 내렸다. 콘크리트 바닥으로 가라않는 서울, 금요일 오후. 아스팔트를 벗어나 1시간여를 달렸다. 진한 솔잎향이 코끝을 찔러왔다. 주말을 앞둔 도심 밖 나들이였다.

세종대왕 탄신일을 맞아 여주 세종대왕릉이 모처럼 문학의 향연에 흠뻑 취했다. ‘2007 세종대왕릉 문학나눔큰잔치-사랑하라 사람아‘. 문화재청의 ‘1 문화재 1 지킴이’ 운동에 한글과컴퓨터가 화답해 이뤄진 행사다. 도심에선 가끔 볼 수 있는 행사지만, 호젓한 지방에서 만나니 또 색다른 느낌이었다. 올해는 특히 도심을 벗어나 여주 세종대왕릉에서 한글 창제의 의미를 되돌아보고 지역 주민과 문화예술을 함께 호흡한다는 취지에서 이곳까지 부러 찾아왔다고 한다. 

왕릉에서 예술행사가 열리기는 국내 처음이다. 그것도 세종대왕과 관련 깊은 ‘문학’을 주제로 음악과 춤이 어우러진다니 더욱 호기심이 당긴다. 5월18·19일 이틀간 열리는 행사 가운데 운좋게 첫날 관람의 행운을 얻었다. 마침 27년전 빛고을의 아픔을 되짚어보는 5·18이었다.

문장의 소리 무대는 넓고 상쾌했다. 아니 무대와 객석이 따로 없었다. 소나무로 둘러싸인 넓은 잔디밭이 공연장이요, 객석이었다. 금요일이란 점을 감안해 서둘렀음에도 조금 늦었다. 왕릉에 도착했을 땐 첫 무대인 인터넷 문학라디오 ‘문장의 소리‘ 공개방송이 한창이었다. 소설가 박범신, 은희경씨가 진행자인 이기호 소설가와 대담을 나누고 있었다. ‘쉿! 저것 봐, 은희경이야.’ 수군거리는 소리, 눈을 떼지 못하는 팬들. 저마다 격의 없이 어울리니 누가 초대손님이고, 누가 관객인가. 250여명의 관객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봄밤의 문학 향기를 맡고 있었다.

본행사가 시작되는가 싶더니 이내 주위가 깜깜해졌다. 준비해둔 조명이 켜지고 왕릉 앞 드넓은 잔디밭이 배우들의 읊조림과 몸동작으로 하나둘 채워진다. ‘봄날의 꿈’은 꽤나 색다른 예술공연이다. 다양한 예술가들이 26편의 국내 대표시들을 소리와 몸짓으로 이어 부르며 한편의 동화같고 환상적인 얘기를 완성하는 복합장르 음악극이다. 극중에선 삶의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분출되는가 하면 격랑의 세월에 휘둘리는 고단한 인생이 비쳐지기도 한다. 삶의 희로애락이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에 빗대 시와 노래로 펼쳐졌다. 16명의 배우가 26편의 시를 춤과 노래로 잇달아 낭송하고, 임동창의 피아노 선율이 대열을 이끌었다. 한글로 만든 가장 아름다운 운율인 시를 사람들이 노래하는 장면이었다. 

책을 박차고 나온 26편의 시들은 어두운 밤하늘로 춤을 추며 날아올랐다. 어느새 시는 봄날 지천에 핀 안도현의 냉이꽃을 따고, 한여름 장마에 떠내려간 기형도의 아버지를 지나, 가을밤 제 울음에 몸을 떠는 신경림의 갈대를 어루만지고, 사랑을 잃고 홀로서기를 배우려는 오세영의 겨울 들녘을 맨발로 헤맨다. 격렬히 한 옥타브를 넘던 배우의 목소리가 어둠속으로 잦아들고, 넘실대는 운율 사이 여백을 임동창의 피아노 선율이 가득 메운다. 촉촉하고 따스한 밤. 사람이 시를, 시가 사람을 어루만지는 무대에 서서 나는 한동안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문학과 문화를 주제로 한 기업 사회공헌활동은 드물다. 더구나 시와 음악이라니. 인문학의 입지가 갈수록 좁아지는 현실에서, 국내 기업이 문학의 작은 마당까지 손길을 내미는 건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화려한 조명과 수천명의 갈채가 쏟아지는 공연은 아니지만, 문학과 시를 사랑하는 관객에겐 그 어떤 공연보다 값지고 잊지 못할 행사로 기억되리라. 5월, 여주의 봄밤은 문학의 향연으로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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