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것의 불편함이 주는 성찰, <아포칼립토>
<아포칼립토>는 불편한 영화다. 스크린에선 쉼없이 피가 튀고 잔인한 도륙이 무덤덤히 반복된다. 아마존 밀림은 베일을 걷어낸다. 날것 그대로의 삶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고개를 돌리지 않고 끝까지 스크린을 주시하려면 범상치 않은 인내와 비위가 요구된다.
평화로운 부족에 공포가 새벽처럼 깃든다. 냉혹한 한 무리의 전사들이 마을을 습격하고, 살육과 주검이 스크린을 메운다. 아버지는 아들의 눈앞에서 침입자의 칼에 스러지고, 아내는 포박당한 아마존 전사 앞에서 처참히 유린당한다. 부족의 신 ‘이쉬첼‘은 어디에 있는가. 생포된 포로들은 침략자들의 왕국으로 끌려가 피의 제단에 바쳐질 운명에 처한다.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와 험난한 가시밭길. 생사의 갈림길에서 주인공은 극적으로 탈출하고, 침입자들의 추격과 피의 복수가 숨가쁘게 이어진다. 뒤이어 다가오는 새로운 두려움의 예감들.
감독 멜 깁슨은 가족을 잃은 슬픔과 죽음의 공포로 한발짝씩 다가서는 전사들의 여정을 느릿느릿 따라간다. 길은 멀고 발부리엔 돌맹이가 채인다. 덤불을 뚫고 격랑을 헤치고 험난한 절벽을 지나 도착해야 할 곳은 죽음의 제단. 느린 화면전개만큼이나 죽음의 공포는 서서히 다가온다. 아마존에선 안락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조차 사치라고 감독은 말하고 싶었던 걸까. 아마존의 날쌘 전사 ‘표범발‘은 그렇게 공포의 극한까지 거북이마냥 끌려간다.
허나 죽음의 문턱에서 극적으로 탈출하는 순간 화면은 롤러코스터마냥 어지럽게 달려간다. 공포는 길고 지루했지만, 마을로 되돌아가는 길은 너무 빠르고 숨가쁘다. 감독 스스로 밝혔듯이 영화는 액션장면과 속도감에 무척 공을 들였지만, 쫓고 쫓기는 자의 절박함과 감정의 디테일은 정작 속도감에 묻혀버렸다. 숨 돌릴 틈 없이 쫓기던 영화 속 주인공의 반격이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같은 이유로, 우물에 갇힌 가족들을 구하는 주인공의 모습 또한 감동이라기보다는 후반부의 속도감에 뒤섞이지 않는 생경한 느낌이다.
영화에 빠져 자칫 범하기 쉬운 실수는 일종의 ‘아마존식 민족주의‘다. 도대체 누가 약탈자이고 누가 피해 입은 주인공이란 말인가. 누군가는 부족을 위해 피의 제단에서 메마른 대지를 적셔줄 단비를 간청하고, 반대쪽에 선 이는 부족을 대신해 이들을 처단해야 한다. 정글에 선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들 아마존의 질서에 따라 삶을 영위하는 영혼들이다.
감독의 의도를 제대로 읽었다면, 가장 잔인한 장면은 오히려 마지막에 등장하는 서구 문명의 함대가 아닐까. 생존을 위한 최후의 대결을 앞둔 두 부족 전사 앞에 홀연히 나타나는 새로운 문명의 침입자들. 문명의 함대는 신대륙을 발견한 기쁨을 만끽할 지 모르지만, 아마존 부족들에겐 오랫동안 유지돼 온 질서가 한순간에 깨질 위기의 순간이다. 그리스어로 ‘새출발‘을 뜻하는 영화 제목 ‘아포칼립토’는 그런 점에서 두 문명의 교차를 역설적으로 변주하는 메타포다.
단순한 내러티브나 마야 문명사를 벗어나는 디테일 혹은 일부 장면의 비현실성을 트집잡을 이도 있겠으나, 참아주길 바란다. 어차피 이성으로도 모든 것을 설명할 순 없잖은가. 한 발짝 물러서서 바라보자. 그 또한 아프리카 야생 밀림이 수천년간 간직해온 문화 아닌가. 신의 축복은 문명의 도시 한복판과 메마른 사막, 아마존 가장 깊은 곳까지 공평하게 적신다. 그 분이 하느님이든 이쉬첼이든.
같은 하늘 아래에서 문명의 우열을 애써 구분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인간의 어리석음. 아마존이 드러내는 날것의 불편함은 서구 문명의 어리석음을 발견하는 불편함에 다름아니다. 영화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윌 듀런트의 잠언은 그런 점에서 서구 문명인의 우월적 시선을 한껏 드러낸다.
"거대 문명은 외세에 정복당하기 전에 내부로부터 붕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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