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매성의 우상
정신적 현상을 사회학적으로 해석하려 할 때 부닥치는 가장 큰 위험은 바로 이러한 개념의 애매한 사용으로, 그것은
또한 우리가 가장 흔히 빠지는 함정이기도 하다. 여러가지 예술양식과 그때그때의 지배적인 사회형태 사이에 결국은 일종의 비유에 지나지 않는
이색적인 상관관계를 찾아내는 것처럼 쉬운 일이 없으며, 이런 대담한 유추로써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보려는 유혹만큼 큰 유혹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은 일찌기 베이컨이 말했던 ‘우상’들과 마찬가지로 진리탐구에 치명적인 것으로, 그가 경고했던 우상에 이어 ‘애매성의 우상’(idola
aequivocationis)이라 이름지어도 좋을 것이다.
- 아놀드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1> 중에서
아놀드 하우저는 예술의 영역과 사회학 영역 사이에 나타나는 의미의 간극을 억지로 끼워맞추려는 행위를 진리탐구에 치명적인 유혹으로 경계하며, 이를 ‘애매성의 우상’이라 일컬었다.
이건 정말이지 황홀한 유혹이다. 취재나 인터뷰 도중, 자신의 의도에 들어맞는 한 마디만 잘라내 쓰고 싶은 욕구가 치밀어오를 때, 말한이의 의도와 앞뒤 맥락을 뻔히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고 싶을 때, 나만의 ‘애매성의 동굴’을 파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유혹은 짧고 강렬하지만 내상은 생각보다 깊다. 독자는 나보다 똑똑했으면 했지, 결코 우둔하지 않다.
흥한 사례는 아직도 숨죽이고 있어 모르겠으나, 망한 사례는 백일하에 드러난 것만도 여럿이다. 전세계를 농락한 황우석 박사의 과학사기극이 그랬고, 어느 보수단체 집회 사회자의 “고등학교도 안 나온 여자가 국모 자격이 있냐” 운운 발언을 앞뒤 맥락 뚝 잘라내고 보도한 ‘신강균의 뉴스서비스 사실은’이 그러했다. 아예 이를 주특기로 내세운 신문들이 버젓이 ‘대표 신문’임을 자임하는 세상이다. “여보세요, 동굴 너무 깊이 팠어요!”
정말이지, 그래선 안 되는 것 아닌가. 자신만의 동굴을 얼마나 더 깊이 파야 우상의 끝을 볼 것인가.
<덧>그러고 보니, 문예사회학적 현상을 글쓰기 영역에서 변주하는 과정에서 나도 똑같이 ‘애매성의 우상’에 빠졌다.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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