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은 책을 읽고 싶어도 구하지 못해 못 읽습니다. 책이 없습니다. 국립장애인도서관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책 제작 신청 서비스가 있는데요. 책을 신청하면 내가 어떤 책을 신청했는지 잊어버릴 즈음 되면 그제서야 옵니다. 접수에만 20일 정도 소요되죠. 그러는 동안 책에 대한 흥미가 떨어지고 맙니다. 시각장애인이 읽을 수 있는 형태의 책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읽고픈 책이 있어도 책이 없다. 빌리고 싶어도, 사고 싶어도 책이 없다. 신간을 구해 읽는 건 더구나 엄두도 못 낸다. 시각장애인에게 ‘독서권’은 아직 먼 나라 얘기다.

전국 44개 점자도서관이 운영되고는 있지만, 시각장애인이 읽고픈 책이 늘 준비돼 있지는 않은 형편이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대체자료’는 얼마나 잘 준비돼 있을까. 지난 2016년 국립장애인도서관이 1년 동안 제작한 대체자료 수는 2천여건. 이 가운데 73.6%는 평균 2-4개월의 제작 기간이 소요됐다. 그러다보니 중증 시각장애인은 읽고픈 책이 있어도 이를 신청하고 기다리기까지 평균 2-4개월, 많게는 1년 가까이 걸리기 일쑤다. 국민권익위원회는 지난 2013년, 시각장애인이 국립장애인도서관에 책을 신청해도 원하는 책이 너무 늦게 제공된다는 점을 문제로 지적하기도 했다. 주요 정보 습득 매체인 책에 대한 접근성을 향상시키는 것은 기본권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문제다.

2017년 기준으로 국내에 등록된 시각장애인은 25만3천여명이다. 이 가운데 인쇄 도서를 읽기 어려운 1·2급 중증 시각장애인은 4만여명에 이른다.

이런 시각장애인의 정보 격차를 정보기술(IT)과 이용자 참여로 극복해보려는 시도가 시작됐다. ‘IT로’(http://itlo.org)다.

IT로 시각장애인 사회적 협동조합 로고

‘IT로’는 시각장애인의 지식정보문화 격차 해소를 위한 e북 크라우드소싱 프로젝트다. 2016년 8월 시작해 올해로 3년차에 접어들었다. 2015년 설립된 ‘IT로 시각장애인 사회적 협동조합’이 주체가 돼 진행한다. IT로는 시각장애인 신체 및 장애 특성에 맞게 최적화된 모바일 생태계 시스템인 ‘센스월드’ 서비스를 활용한다. 자원봉사자들이 십시일반 참여해 기존 종이책을 디지털 대체자료로 제작·보급하는 것이 뼈대다. 첫 단계로 종이책을 전자책(e북) 형태로 변환해 시각장애인에게 보급하는 사업을 진행 중이다. IT로는 2년이 넘는 시범 운영 기간을 거쳐 지난 10월1일, 새단장한 웹사이트를 공개했다.

시각장애인용 e북을 제작하는 몫은 협동조합과 자원봉사자들이 나눠 맡는다. 우선, 협동조합 소속 사서들이 제작 후보 서적들을 골라낸다. 국립장애인도서관에 없고, 기존에 제작된 적 없는 책 가운데 골라낸다. 도서가 선정되면 자원봉사자들이 본격 활동에 나선다. 자원봉사자들은 협동조합이 자체 개발한 편집도구를 이용해 각자 맡은 분량을 책임진다. 책 내용을 일일이 다시 입력할 필요는 없다. 편집도구가 광학문자인식(OCR) 기술을 이용해 변환한 내용을 검수하는 것이 주된 일이다. 자원봉사자 검수가 끝나면 사서의 최종 목차 검수를 거쳐 서비스가 시작된다. 이 전체 과정을 일주일 안에 마무리하는 것이 IT로 서비스의 목표다. 중증 시각장애인들은 신청 후 2-3개월, 길게는 6개월 이상 기다리던 책을 일주일 안에 대여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시작은 척박했다. 사업 첫 해인 2016년, 뜻 맞는 몇몇 이들이 모여 협동조합을 설립하고 조합원을 모으기 시작했다. 시각장애인의 독서 환경을 설명하고 출판사들의 참여를 요청했다. 벽은 높았다. 출판사들은 자사 책을 e북으로 제작, 시각장애인에게 대여하자는 제안에 하나같이 손사래를 쳤다. 다행히 시공사가 1천만원 정도의 책을 조건 없이 기증했다. 요청하면 언제든지 책을 추가로 보내주겠다는 약속도 덧붙였다. 덕분에 e북 제작을 위한 싹은 틔울 수 있었다. 그렇게 첫 해, 1200여명의 자원봉사자가 참여해 e북 700여권을 제작·보급했다.

사업 2년차인 2017년, 도약의 물꼬가 트였다. 삼성전자와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공동 진행하는 ‘나눔과꿈’ 사업에 IT로가 선정돼 3년간 5억여원을 지원받게 됐다. 자원봉사자 모집도 탄력을 받았다. 한국자원봉사협의회와 한국대학사회봉사협의회, 1365 자원봉사포털 등과 연계하며 자원봉사 활동을 원하는 고교·대학생과 직장인의 참여가 본격화됐다. 언제 어디서나 인터넷에 연결된 PC만 있으면 다른 이를 돕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점이 이들의 참여를 이끌었다. 2018년 10월 현재 IT로에 등록된 자원봉사자 수는 5500여명이다. IT로 서비스를 이용해 대여할 수 있는 책도 3700여권으로 늘었다.

김정호 IT로 시각장애인 사회적 협동조합 대표

| 김정호 IT로 시각장애인 사회적 협동조합 대표

혹시 발생할지 모를 저작권 침해 문제도 보완장치를 마련했다. 국내 저작권법 제33조 제1항과 제2항은 공표된 저작물에 대해 비영리 목적으로 시각장애인을 위해 점자로 복제·배포·전송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이용 방식에 대해서도 저작권법 시행령 제14조 제2항에서 ‘기술적 보호조치가 적용된 정보기록방식’을 허용하도록 규정돼 있다. ‘IT로’는 화면 캡처나 도서 내용을 복사해 이용하지 않도록 e북에 대해 워터마크 처리를 하고, 자원봉사자 1명이 한 번에 편집할 수 있는 분량을 최대 10페이지로 제한하며, 일정한 시간이 지나야 다음 번 도서 내용을 편집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하는 식으로 저작권 보호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제33조(시각장애인 등을 위한 복제 등) ①공표된 저작물은 시각장애인 등을 위하여 점자로 복제ㆍ배포할 수 있다.
②시각장애인 등의 복리증진을 목적으로 하는 시설 중 대통령령이 정하는 시설(당해 시설의 장을 포함한다)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아니하고 시각장애인 등의 이용에 제공하기 위하여 공표된 어문저작물을 녹음하거나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시각장애인 등을 위한 전용 기록방식으로 복제ㆍ배포 또는 전송할 수 있다.
③제1항 및 제2항의 규정에 따른 시각장애인 등의 범위는 대통령령으로 정한다.

IT로 서비스 배경엔 절실함과 목마름이 자리잡고 있다. 김정호 IT로 대표는 “돈으로 해결 안 되는 사회적 문제를 IT로 해결해보려는 것이 사업의 출발이자 목적”이라며 “크라우드소싱이라는 프로세스 혁신을 통해 사회적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해결해보려는 시도”라고 사업 배경을 설명했다. 사업을 주도하는 신희원 국장은 “e북 제작 사업을 시작으로 시각장애인 아동·청소년을 위한 과학영재교실이나 점자도서관 설립, 시각장애인 아동 학습지원센터 설립 등으로 확대할 것”이라고 계획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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