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체인은 혁명이다. 블록체인은 ‘플랫폼’의 존재 이유에 근본적 의문을 제기한다. 서비스와 재화를 매개하는 플랫폼을 건너뛰고, 개인끼리 직접(P2P) 거래하자고 말한다. 개인간 거래 증명은 블록체인 알고리즘이 맡는다. 이 시스템을 돌리는 데는 거대한 컴퓨팅 자원이 들어간다. 슈퍼컴퓨터나 서버 대신 개인은 자신의 자원, 즉 PC나 휴대기기 등을 시스템의 일부로 제공한다. 이 노드(개인)들이 얽히고 설켜 거대한 분산시스템을 이룬다. 플랫폼을 쥐고 있는 주인이 없기에 누군가 시스템에 개입하거나 남용할 여지도 줄어든다. 자원을 제공하는 개인은 그 대가로 가상화폐를 받는다. 대표적인 게 비트코인이다. 플랫폼 없는 P2P 거래, 말하자면 네이버 없이 뉴스를 읽고 은행 없이 돈 거래를 하자는 거다. 인터넷 탄생 이래 이런 혁신이 있었던가.

블록체인은 거품이다. 적어도 지금 상황은 그렇다. 지금 블록체인을 말하는 이들은 혁신적 시스템 위에 새로운 서비스를 얹는 데는 큰 관심 없어 보인다. 대부분은 시스템의 부산물인 ‘○○코인’ 몸값에만 촉각을 곤두세운다. 이 코인은 안전장치가 없다. 널뛰기하는 몸값에 편승해 치고 빠지기 식 투기만 난무한다. 세상에 없던 서비스를 만들기보다는 가상화폐 공개(ICO)로 목돈을 끌어모을 궁리에 골몰한다. 지금 블록체인과 비트코인을 칭송하는 이들에게선 혁신이 아니라 흑심만 보인다.

새로운 시도도 한켠에선 싹틔운다. ‘시빌’이 그렇다. 시빌은 블록체인 기반 뉴스 플랫폼이다. 시빌에선 언론사 사주도, 광고국도 없다. 데스크와 기자로 이뤄진 전통 편집국 조직도 시빌에선 없다. 시빌은 이를테면 오픈마켓이다. 기자와 독자가 기사를 매개로 거래할 수 있게 돕는 곳이다. 누구든 기자로 등록하고 기사를 올릴 수 있다. 독자는 기사를 보고 마음에 들면 가상화폐 ‘CVL 토큰’으로 기사를 구입해 읽는다. 거래 정보는 해당 기사 블록체인에 저장되고, 일정 수수료를 떼고 기자에게 지급된다.

시빌은 기자와 독자를 매개할 뿐 기사 내용에는 개입하지 않는다. 기사 정보가 개별 단말기(노드)에 저장돼 있으므로, 한쪽에서 임의로 내용을 수정할 수도 없다. 특정 자본이나 정치적 입김이 개입할 여지를 시스템 안에서 차단해버린 것이다. 저널리즘 자문위원회와 팩트 체커도 따로 두고 있다. 기사 거래와 구독을 결합한 수익모델도 블록체인과 가상화폐로 자연스레 해결했다. 시빌은 최근 500만 달러, 우리돈 56억원가량의 투자를 유치했다. 2018년 초 공식 출범할 예정이다.

중국 스타트업 에너고랩스는 블록체인 기반으로 개인간 전력 거래를 할 수 있는 P2P 에너지 거래 시스템을 만들었다. 분산형 자율 에너지 커뮤니티를 만들어, 이들이 자체 생산해 쓰고 남은 전력을 블록체인 기반 시스템 위에서 개인끼리 거래하도록 한 것이다. 한국저작권위원회는 저작권료 정산·분배에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하는 방안을 연구 중이다. 거래 참여자 모두에게 거래 내역을 보내고 거래가 이뤄질 때마다 이를 대조해서 데이터 위조를 막고 거래 투명성을 보장하자는 취지다.

개인 간 연결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네트워크 시스템의 밑그림은 20여년 전 이미 등장했다. 레이 오지. IBM의 유명한 협업 소프트웨어 ‘로터스 노츠’와 ‘로터스 심포니’, 세계 최초의 전산 스프레드시트 ‘비지캘크’ 등을 만든 전설의 소프트웨어 아키텍트다. 레이 오지는 마이크로소프트 최고 소프트웨어 아키텍트(CSA)로 일하며 ‘MS 오피스 그루브’를 만들었다.

그루브는 개인 간 협업을 돕는 그룹웨어 소프트웨어다. 그런데 업무 중개를 위한 서버 없이 개인간 PC를 직접 연결해 정보를 주고받는다. 이메일 기반으로 개인간 인증키를 만들고, 정보는 암호화해 네트워크로 주고받는다.  A가 중요한 파일을 B에게 보낸 뒤 A와 B 모두 그루브 프로그램을 PC에서 지웠다 치자. 이 파일은 누군가 PC에 그루브를 다시 설치하고 B의 아이디로 로그인하지 않는 이상, 아무도 찾지 못한다. 분산된 P2P 네트워크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 뿐이다. 배회하던 혁신의 씨앗은 20년 뒤 핀테크 토양에 뿌리내려 분산형 거래증명 시스템을 싹틔웠다.

블록체인은 민주적 디지털 시스템이다. 그 명제가 증명되려면 현실에 먼저 적용돼야 한다. ‘블록체인=투기판’이란 등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는 가설일 뿐이다. 분산형 거래 시스템, 이를 구현할 광장을 도모할 때다. 비즈니스야 ‘업계’ 몫이라 쳐도, 공익을 위한 플랫폼을 도모하는 일에 분산된 우리 지혜를 모아볼 순 있지 않겠는가. 그것이 ‘플랫폼’이 저물고 ‘연결’이 지배하는 시대를 준비하는 우리의 자세다.

(<한겨레21> 제1188호, 2017년11월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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