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인간에게 먹거리를 보냈고, 악마는 요리사를 보냈다.” – 톨스토이

음식의 유혹은 요리에서 발원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악마는 누구에게나 유혹할 기회를 주지는 않는다. 시각장애인이나 저시력자에게 요리는 또다른 문턱이다. 요리나 TV 보기, 책 읽기 같은 평범한 일상도 저시력자에겐 녹록지 않은 일이다. 사물의 색깔이나 경계를 구분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시력자들은 보조기구를 쓰거나 명암차를 높여 사물을 인지한다. 밝은 색 음료는 어두운 잔에, 어두운 음식은 흰 접시에 담는 식이다. 스마트폰에 저시력자를 위한 ‘고대비’ 기능이 들어 있는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시각장애인에게 요리의 즐거움을 돌려주자. ‘루시’(LUCIR)에 주목하는 까닭이다. 루시는 ‘스마트도마’다. 저시력자나 시각장애인을 돕고자 태어났다.

디자이너 최오규 씨는 몇 년 전 일본 츠쿠바시에 살았다. 츠쿠바는 일본에서 유일한 시·청각장애인 전문 고등교육기관인 츠쿠바기술대학이 자리잡은 곳이다. 덕분에 최오규 씨는 시·청각장애인 이웃을 여럿 만났다. 노안, 녹내장, 백내장, 당뇨망막병증…. 눈이 불편한 이들은 요리할 때 어려움과 불편함을 겪고 있었다. 무엇보다 색 대비가 뚜렷하지 않아 사물 인지에 어려움을 겪었다. 답은 간단했다. 요리할 때 색 대비를 또렷하게 만들어주면 될 일 아닌가. 그렇게 루시를 구상했다.

루시는 센서와 웹캠, LED로 구성돼 있다. 원리는 간단하다. 도마에 재료를 올려놓는다. 그러면 도마 위에 달린 웹캠이 물체 색깔을 감지해 색상값(RGB)을 뽑아낸다. 센서는 이를 기반으로 가장 대비가 높은 색깔을 계산한다. 이용자가 도마 앞에 달린 센서에 손을 갖다대면 곧바로 도마 색깔이 바뀐다. 복잡해보이지만, 모든 과정은 눈깜짝할 새 이뤄진다. 이용자는 그저 재료를 올려놓고 센서에 손만 대면 된다.

루시는 조명을 바꾸는 것만으로 저시력자가 손쉽게 요리를 하도록 돕는 기기다. 굳이 복잡한 장비를 이용해 주방 전체에 고대비 환경을 구축할 필요 없이 ‘요리’에 집중했다. 저시력자는 색 대비만으로 요리 도중 손을 베이는 식의 안전사고를 적잖이 예방할 수 있다. 그렇지만 색상 대비를 손쉽게 적용할 수 있는 저시력자 전용 조리도구는 드물다. 루시가 가치를 지니는 대목이다.

인체공학 디자인으로 시각장애인의 요리 활동을 돕는 제품도 있다. 디자이너 케빈 치암시각장애인을 위한 주방기구 5종을 올해 9월 선보였다. 먼저, 식칼엔 날을 감싸는 보호대를 감쌌다. 이 보호대는 손을 베지 않게 해주고 식재료도 일정한 간격으로 썰도록 돕는다. 도마 양쪽엔 식재료를 흘리지 않고 손쉽게 담을 수 있는 트레이를 달았다. 가스레인지 냄비 받침대는 시각장애인이 화구 주변을 손쉽게 인지할 수 있도록 고안했다. 계단형에 툭 튀어나오게 설계한 덕분에 받침대를 더듬다 손을 데지 않고, 냄비도 정중앙에 놓을 수 있다.

냄비 뚜껑과 티스푼도 단순하지만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냄비 뚜껑은 기존 상식과 반대로 오목하게 설계했다. 주방 재료나 조리기구를 냄비 위에 올려두고 손쉽게 찾도록 한 배려다. 티스푼 손잡이엔 부표를 달았다. 부표는 물이 어느 정도 차올랐는지 촉각으로 알 수 있게 해준다. 물을 따를 때 흘러넘치거나 뜨거운 물에 데지 않도록 막는 역할을 한다.

가상현실(VR)이나 사물인터넷(IoT)을 활용해 시각장애인이 사물을 손쉽게 인지하게 돕는 장치들은 여럿 나왔다. 삼성전자 씨랩(C-Lab)은 VR 헤드셋 ‘기어 VR’를 이용해 시각장애인이 글자를 읽을 수 있게 돕는 ‘릴루미노’를 올해 초 선보였다. 전자정보연구센터는 IoT를 활용해 주변 사물을 인지해 셋톱박스에 전송하면 음성으로 해당 정보를 읽어주는 시스템을 연구 중이다. 루시와 케빈 치암의 주방기구는 첨단 기술이나 복잡한 설계 대신 단순한 아이디어와 이웃에 대한 세심한 관찰을 잘 버무려 장애의 문턱을 깎는 데 한몫한다.

(<한겨레21> 제1184호, 2017년10월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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