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파나마에서 ‘폭탄’이 터졌다. 파나마 최대 로펌인 모색 폰세카의 캐비닛에 숨어 있던 은밀한 자료가 세상에 공개된 것이다.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가 오랫동안 공들여 준비한 프로젝트였다. ‘파나마 페이퍼스’는 세상을 발칵 뒤집었다. 공개된 문서만 1150만 건. 조세도피처에 숨어 있던 각국 정상들과 기업인, 슈퍼리치들의 이름이 줄줄이 소환됐다. 국내에서도 전직 대통령 친인척과 유명 기업인 등이 목록에 오르며 곤욕을 치렀다.

이 가운데는 파키스탄 총리 일가도 포함돼 있었다. 나와즈 샤리프 총리와 그의 네 딸 가운데 3명이 조세도피와 축재 혐의로 입길에 올랐다. 가장 문제가 된 건 딸 마리암 샤리프가 소유한 것으로 돼 있는 영국 런던 소재 호화 아파트였다. 파키스탄 국민들은 분노했고, 정부는 합동조사반을 꾸려 공식 조사에 나섰다. 여론이 악화되자 마리암은 트위터로 ‘나는 그 아파트의 위탁관리자일 뿐, 소유자가 아니다. 증거도 있다’라고 밝히며 파키스탄 대법원에 제출했다는 4장짜리 문서를 공개했다. 여기서 문제가 터졌다. 그 문서 작성에 쓰인 글꼴, ‘칼리브리’(Calibri)체 때문이다.

칼리브리는 영문 글꼴이다. 자간이 넓지 않고 둥글며 깔끔한 모던 산세리프 타입 글꼴이다. 네덜란드 글꼴 디자이너 루카스 드 그루트가 2004년 디자인했고, 2007년 출시된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07’과 ‘윈도 비스타’에 처음 탑재됐다. 칼리브리는 타임스 뉴 로만(Times New Roman)을 대신해 MS 워드 2007의 기본 글꼴로, 에이리얼(Arial)을 대신해 엑셀·파워포인트·아웃룩 2007의 기본 글꼴로 채택되며 큰 인기를 끌었다. 지금도 전세계를 통틀어 영문 이메일이나 발표자료 작성 시 가장 널리 쓰는 글꼴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마리암이 증거물로 제출한 문서의 작성일이 2006년 11월8일이란 점이었다. 칼리브리 글꼴이 처음 개발된 건 2004년이다. 그렇지만 공식 선보인 건 2007년 1월30일 윈도우 비스타와 MS 오피스 2007이 출시되면서부터다. MS 오피스 2007 베타판이 2006년 11월30일 나오긴 했지만, 극히 일부 이용자만 대상으로 사용됐다. 마리암이 제출한 문서가 위조됐을 가능성이 의심되는 대목이었다.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칼리브리는 2004년 8월9일, ‘롱혼’이란 코드명으로 불린 윈도 베타판이 출시될 때 공개됐다’는 내용을 담은 쿼라 화면이 트위터로 올라와 논란에 불을 지폈다. 쿼라는 이용자끼리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는 질의응답 서비스다. 여기 올라온 답변대로 마리암이 공개한 문서 작성일에 이미 칼리브리 서체가 널리 쓰이고 있었다는 항변인 셈이다.

그러자 파키스탄 일간지 <DAWN>은 칼리브리 서체 디자이너인 루카스 드 그루트의 회사 루카스폰트에 직접 질의서를 보냈다. 루카스폰트의 답변은 이랬다. “칼리브리의 첫 공개 베타버전은 2006년에 나왔다. 정확한 날짜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누군가 공식 문서에 쓰기 위해 베타버전에서 글꼴을 복사할 가능성은 극히 낮아 보인다.” 마리암은 이 답변으로 그로기 상태에 빠졌다.

합동조사반은 지난 7월 둘째 주 공개한 수사보고서에서 마리암이 대법원에 제출한 문서가 위조된 것으로 최종 결론내렸다. 결정적 증거는 칼리브리 서체였다. 한 나라 지도자 일가의 비위 사건에 글꼴이 결정적 증인으로 나선 건 유례없다. 이 사건은 수사보고서가 공개된 뒤 지금까지 ‘#FontGate’(폰트게이트) 해시태그를 달고 소셜미디어에서 수많은 패러디를 낳고 있다. 트위터 이용자 ‘Mahrukh’의 트윗이 압권이다. 그는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가 나와즈 샤리프 총리와 대담을 나누는 사진을 올리면서 이렇게 썼다. ‘빌 게이츠가 나와즈 샤리프에게 칼리브리 서체를 만들어줘서 고맙다며 개인적 감사 인사를 전하고 있다.’ 서체에 덜미 잡힌 부패 정치인의 어설픈 조작극은 이렇게 웃픈 결말로 끝났다.

(<한겨레21> 제1172호, 2017년 7월3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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