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그라니 텅 빈 방에서 홀로 눈을 뜬다. 거울을 들여다보면 피부와 건강 상태가 뜨고, 옷장을 여니 오늘 업무에 맞는 옷을 추천해준다. 쇼핑몰을 지나가면 내 취향과 체형에 맞는 상품 정보가 가상현실(VR) 영상으로 펼쳐진다. 자율주행차를 타고 사무실에 도착해 노트북을 여니, 업무 시스템 업그레이드와 함께 해고 통보가 뜬다.

영국 <가디언>이 올해 2월 내놓은 애니메이션 ‘지구 최후의 직업’은 기술이 만들 디스토피아를 그린다. ‘일’이 더이상 사람의 몫이 아닌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모든 것이 센서와 네트워크로 움직이는 사회에서 인간은 주변부를 떠돈다. 자동화가 지배하는 시스템에선 헬스 기기가 고장나도 도와줄 이는 없다. 푸드뱅크 앞에 길게 줄을 선 인간들, 그들에게 직업은 존재할까. 애니메이션은 예언한다. “30년 안에 현재 직업의 50%가 사라질 것”이라고.

기술의 우울한 진단, 디스토피아는 미래가 아니라 현실이다. 인텔은 메모미랩스와 손잡고 이용자에게 맞는 옷을 추천해주는 스마트거울을 시범 운영 중이다. LG유플러스와 한샘은 피부 상태를 자동 체크해 적절한 관리법과 화장품을 추천해주는 ‘매직미러’를 내놓았다. 아토스랄프로렌은 내장 센서로 심박수와 호흡, 근육 상태 등을 측정해주는 스마트 의류를 20-60만원에 시판 중이다. 양치질 상태를 측정해주는 스마트칫솔이나 구글 자율주행차는 이미 우리에게도 친숙한 물건이다.

영화감독 게이치 마쓰다가 그려내는 ‘하이퍼 리얼리티’는 미래에 대한 극단적 묵시록이다. 이 초현실 세계에선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지워진다. 우리가 탄 버스 안 풍경은 그 자체로 자극적이고 변화무쌍한 정보의 블랙홀이다. 오늘자 뉴스부터 구인구직 광고, 휴대폰 문자메시지, 각종 서비스 포인트 정보까지 현실에 투사돼 떠다닌다. 카메라는 모든 경험과 상호작용이 어지러이 뒤섞인 도심 공간을 미로처럼 떠돌 뿐이다. 기술을 발끝까지 소화한 미래 사회는 원색의 강렬함 만큼이나 회색빛 절망을 토해낸다.

그럼에도 기술은 상업 자본과 만나며 우리에게 희망을 놓지 말라고 부추긴다. 구글의 가상현실 페인팅 도구 ‘틸트브러시’를 활용한 광고 ‘코트 비전’을 보자. 미국 프로농구협회(NBA) 선수들의 화려한 움직임 속엔 에너지 음료 ‘마운틴 듀’의 상업적 욕망이 각인돼 있다. 올해 9월 멕시코에서 열린 ‘국제 혼합·증강현실 심포지엄 2016’에서 가상현실 기기 제조사 메타컴퍼니는 흥미로운 실험 결과를 내놓았다. 이들은 실험자를 두 그룹으로 나누고 각각 종이도면과 3D 가상현실 도면을 제공해 레고블럭을 조립하게 했다. 그 결과 가상현실 도면으로 조립한 그룹이 종이도면 그룹보다 20% 더 빨리 레고블럭을 완성했다. 가상·증강현실이 신경계에 해로운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이걸 봐. 인간이 가상 환경에서 더 높은 학습 효과를 올릴 수 있잖아. 우리는 여전히 가상현실과 사물인터넷, 웨어러블 기술에 미래를 베팅한다.

첨단 기술과 결합된 자본은 우리에게 장밋빛 미래를 제시하지만, 동시에 현실왜곡장으로 작동한다. 아무리 초라한 현실에 발딛고 있는 이라도 가상현실 속에선 NBA 스타가 되고, 최신 스포츠카를 탄 제임스 본드로 탈바꿈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BMW에, 코카콜라와 나이키에 시나브로 중독된다.

‘4차 산업혁명’이란 허울 좋은 메시지 뒤엔 꼭두각시 인류의 미래가 똬리틀고 있다. 기술과 센서로 도색된 버스에 올라탄 인간은 가상현실이 주입하는 정보를 영특하게 걸러낼 수 있을까. 첨단 기술의 화려함 뒤에 숨은 은밀한 메시지를 걸러내는 사회적 거름망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우리는 더 늦출 순 없는 숙제를 마주하고 있다.

(<한겨레21> 제1138호, 2016년 11월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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