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미 킹은 영국 독립영화 제작자다. 그는 2006년 ‘이 영화를 훔쳐라’(Steal This Film)란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었지만, 처음부터 할리우드 배급 시스템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대신 제이미 킹은 대형 토렌트 파일 공유 서비스 ‘파이어릿베이’와 손잡고 영화를 뿌렸다. 웹사이트에도 영화 파일을 올려 누구나 내려받게 했다.

4년 전 한국을 찾은 그를 만났을 때 물었다. “그렇게 해서 돈이 되겠어요?”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영화를 내려받은 사람이 어림잡아 700만명이 넘었어요. 영화를 본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낸 기부금도 3만달러를 넘어섰고요.”

제이미 킹은 할리우드를 지배하는 거대 상업 배급망의 폐쇄성에 환멸을 느꼈다고 했다. “지금까지는 제작사와 배급사가 독점 계약을 맺고 일정 기간동안 영화를 독점 보급했죠. 잘 나가는 몇몇 영화 외에는 이같은 제도의 혜택을 보기란 어렵습니다.”

제이미 킹은 제 생각을 직접 증명해 보이기로 했다. 그는 2009년 10월 ‘보도’(VODO)란 서비스를 만들었다.

보도는 저작자나 영화 배급사와 손잡고 합법적으로 영화를 무료 배포한다. 영화는 한 달에 한 편씩만 올린다. 좋은 작품을 더 많은 사람들이 내려받을 수 있도록 마케팅을 집중하기 위해서다. 영화를 본 사람들이 고마움을 보탤 수 있는 장치도 마련했다. 원하는 금액을 페이팔로 기부하거나, 영화를 다른 사람에게 널리 퍼뜨리면 된다. 지금은 인디 뮤지션이나 작가의 작품도 두루 유통한다.

자본은 매정하다. ‘돈 있는 자에게 유통망을 허하노라.’ 진입 단계부터 자본의 문지기에 가로막힌 ‘비주류’ 문화상품들은 어떡해야 할까. 프란츠 카프카의 ‘법 앞에서’에 나오는 시골남자처럼, 문지기가 문을 열어줄 때까지 하염없이 쭈그리고 앉아 기다려야 하는 걸까.

미국 TV 시리즈물 ‘베로니카 마스’는 누리꾼의 쌈짓돈에 기대를 걸어보기로 했다. ‘베로니카 마스’는 2004년부터 2년7개월 간 미국 UPN 채널로 방영돼 인기를 끌었다. 종영된 뒤에도 팬들은 이 매력적인 시리즈물을 영화로 제작해 달라고 요구했다. UPN을 인수한 워너브라더스는 2013년 3월, 롭 토마스 감독에게 한 달 안에 200만달러를 모으면 영화를 제작·배급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감독은 크라우드펀딩 서비스 킥스타터에 프로젝트를 올렸다. 불과 10시간 만에 목표액 200만달러가 모였다. 4월13일 모금이 끝났을 때 9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570만달러를 보탰다. 이 영화는 오는 3월14일 정식 개봉된다.

‘베로니카 마스’가 유쾌한 실험의 기억이라면, ‘천안함 프로젝트’는 미완의 성공으로 남은 사례다. ‘천안함 프로젝트’는 2010년 일어난 천안함 침몰 사건과 관련된 각종 의혹을 다룬 영화다. 지난해 9월 개봉했지만, 극장은 석연찮은 이유를 들어 이틀만에 상영을 중단했다. 그 뒤 IPTV 서비스마저 제대로 진행되지 않자, 제작진은 12월초 영화 파일을 주요 포털 서비스를 통해 무료로 뿌려버렸다. 영화 ‘MB의 추억’ 배급사인 스튜디오 느림보는 상영관 확보에 어려움을 겪자 아예 e메일로 영화 파일을 대여하는 ‘공동체상영’을 선택했다.

입춘 갓 지난 2014년 2월 거리. 영화 한 편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또 하나의 약속’은 고 황유미 씨 사연을 다룬 영화다. 황유미 씨는 2003년 삼성전자 기흥공장에 입사한 뒤 3년여 만에 백혈병으로 숨졌다. 메가박스는 영화 개봉을 하루 앞둔 2월5일, 일방적으로 개봉관을 15곳에서 3곳으로 줄였다. 그 때까지 ‘또 하나의 약속’은 개봉작 예매율 1위, 전체 영화 예매율 3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메가박스는 납득할 만한 이유를 대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손’은 건재하다. 우리 선택은 둘 중 하나다. 시골남자로 남거나, 다른 문을 찾거나.

제이미 킹과 보도, 킥스타터와 토렌트 유통 방식이 영화계를 주무르는 상업 유통망에 맞설 수 있을까. 쉬운 싸움은 아닐 게다. 그래도 희망은 남는다.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의 철면피에 조그만 생채기는 낼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지치지 않고 바늘을 찔러대는 것이다. 달콤하고 황홀한, 그래서 힘겨운 전복의 기운을 끊임없이 소환하는 것이다. 그것이 자본의 텃세에 맞서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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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2014년 2월17일, 제99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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