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 지식은 썩는다. 학술 지식이라면 더욱 그렇다. 대학 서고에서 잠자는 지식을 보며 내 저작물이 안전하게 보호되고 있다고 흡족해한다면 그를 학자라 부를 수 있을까. 무릇 학문이란 광장에서 토론하고, 숙의하고, 반성하는 과정을 거치며 숙성하는 법인데.

그럼에도 일부 지식소매상은 문단속에 여념 없다. 저명함을 자처하는 학술지를 떠올려 보자. 이들은 ‘저작권’이란 자물쇠를 앞세워 겹겹이 울타리를 치고, 통행료를 낸 지식순례자에게만 입장을 허락한다. 이 문을 통과해 학문의 성지로 들어가려면 적잖은 금전을 대가로 치러야 한다. 그러다보니 내 학술 연구가 담긴 저널을 돈을 내고 봐야 하는 웃지 못할 상황도 잇따른다. 폐쇄적인 지식의 ‘이너서클’은 곧 자본으로 치환된다.

‘오픈액세스’ 운동은 이런 폐쇄된 지식 생태계에 물꼬를 트고자 시작된 운동이다. 그 정신은 전통 학술지의 지식 유통 방식과 대척점에 서 있다. 2002년 공표된 ‘부다페스트 오픈액세스 이니셔티브’는 이 지식공유 운동의 주춧돌이 됐다. “모든 이용자는 재정적, 법적, 기술적인 장벽에 구애받지 않고 문헌의 전문을 읽고, 내려받고, 복사하고, 배포하고, 인쇄하고, 검색하거나 링크할 수 있고, 이를 색인으로 만들기 위해 수집하고 다른 합법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

이 선언은 저작자, 그러니까 논문을 쓴 저자가 직접 온라인으로 자기 논문을 업로드하도록 권장한다. 저작물 배포 대행업체나 상업적 학술지를 이용하면 다른 사람이 지식 자료에 접근할 때 비용이나 기술 장벽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오픈액세스 정신을 이어받은 ‘오픈액세스 저널’도 나왔다. 오픈액세스 저널은 공개된 학술 자료를 모아 데이터베이스(DB)화하고, 이를 기반으로 출간하는 저널(잡지)을 일컫는다. 국내에선 대학의학학술지편집인협의회가 주축이 돼 1990년대 중반부터 ‘코리아메드’란 의학정보 통합검색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2010년 5월에는 한중일을 포함한 서태평양 지역 의학 논문을 한데 검색할 수 있는 ‘서태평양지역 의학정보 인덱스’(WPRIM)도 문을 열었다.

전통과 권위를 생명처럼 여기전 기존 학술지도 이런 개방 흐름에 조금씩 빗장을 푸는 추세다. 의학·과학 분야에서 140년 넘게 권위를 지켜온 ‘네이처’는 지난 2011년 ‘사이언티픽 리포트’란 온라인 오픈액세스 저널을 발간했다. 학술지 기고부터 리뷰, 유통까지 모든 과정을 독자에게 개방한 ‘열린 저널’이다.

지금까지 전통과 권위를 내세우는 학술지들은 제작 비용을 부담하는 대신, 지식 소비자에게 비용 일부를 짐지웠다. 비싼 잡지 가격은 독자가 지식 정보 사이에 높은 울타리를 쌓았다. 그러면서 학자들에겐 논문 게재 문턱을 높이는 식으로 학술지는 권위를 유지했다.

오픈액세스 저널은 제작 비용을 독자가 아닌 저자가 부담하는 대신, 논문을 게재하는 문호를 넓혔다. 등재된 논문은 누구나 자유롭게 활용하도록 공개한다. 논문과 잡지의 ‘권위’에 대한 판단을 독자에게 맡기는 셈이다. 논문이 널리 공유되는 만큼, 저자는 스스로 표절·날조·위조에 대해 자기검열 과정을 더욱 엄격히 거치게 된다. 하지만 문턱이 낮은 오픈액세스 저널은 논문 질 저하 위험도 끊임없이 경계해야 한다. 개방과 권위,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게 오픈액세스 저널의 과제다.

오픈액세스 운동은 지식을 조건없이 무료로 개방하자는 ‘프리액세스’와 구분된다. 누구나 쉽게 접근하고 널리 이용하도록 만들되, 가치에 적합한 대가를 받자는 얘기다. 지식 정보를 많이 모으고, 꾸준히 새로운 정보로 갱신하고, 합당한 가치에 맞게 널리 소비되도록 하는 3가지 요소가 오픈액세스 운동의 핵심이다.

오픈액세스 운동의 뿌리엔 ‘배움에는 문턱이 없어야 한다’는 정신이 깃들어 있다. 돈이 없어서, 배움터가 멀어서, 통신망이 막혀 있어서 배울 기회를 놓치는 비극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지식 정보가 실시간 유통되는 시대다. 우물 안 지식, 이제 넓은 바다로 풀어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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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2013년 12월2일, 제98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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