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아티스트가 될 생각은 없었다. 세상에, 아티스트라니! 이 단어는 그러니까 뭔가, ‘외계인’이나 ‘안드로메다’란 말을 들을 때처럼 귀에 닿는 순간 미끄러지는 말이었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될 줄이야.

어슬렁(@netstrolling) 얘기다. 주말 연예 프로그램만큼 버라이어티하지는 않지만 딱히 지루하지도 않을 얘기 한 자락 들어보시라.

#1.

그 전까지 했던 일은 ‘창작과 나눔으로 세상을 즐겁게 바꾸는’ 일이었다.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게다. CCL이라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인데, 한마디로 ‘저작물 이용허락 표시’랄까. 요컨대 저작물에 이용 허락 표시를 미리 달아 공개하고, 이걸 공유하고 활용해 또 다른 창작물로 만들자는 그런 얘기다. 이 CCL을 보급하는 비영리단체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CC코리아)의 상근 활동가. 지난해까지 어슬렁 명함에 박혀 있던 문구다.

굳이 그 앞까지 거슬러올라가자면, 산업공학을 전공하고, 닷컴 버블때 웹기획도 좀 했고, 정보사회학을 공부해 석사 학위도 땄고……. 뭐, 인터넷과 문화 언저리에서 말 그대로 어슬렁~거렸다. 자기소개는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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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는 일이 일인지라, 고민도 많았다. 창작물에 되도록 이용 허락 표시를 달도록 알리고→이런 창작물을 널리 퍼뜨리고→다른 이들이 이를 배경으로 2차 창작물을 만들어내고→다시 이 창작물이 이용 허락 표시를 달고 널리 퍼지고. 이게 이른바 ‘선순환 구조’다. 그런데 고민이었다. 무엇보다 질료가 될 창작물 자체를 확보하기 어려웠다. 남의 창작물을 공유하거나 가져다 쓰는 이는 많아도, 직접 창작 활동을 하는 이는 귀했다. 그러다보니 순환 고리가 끊어지고, 힘도 빠지고.

그래서 결심했다. 창작을 많이 하면 해결되는 거잖아! 내가 직접 해보는 거야.

첫 창작 프로젝트로 ‘그림’을 선택했다. 원래 그림 그리는 데 소질이 있었던가? 딱히 그렇지도, 아닌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이런 믿음은 있었다. “누구나 창작자가 될 수 있다.” 사실, 그렇잖아. 사람들이 그림을 못 그리는 게 아니라 안 그릴 뿐이라고. 학교에서 점수로 평가하는 그런 시스템에 익숙해진 탓에 그림을 그리는 데 두려움이 생겼을 뿐이니까. 한 번 그려보면 생각이 달라질 걸. 누구나 자기 안에 예술가가 있으니까.

그래도 준비는 해야 하잖나. 참여연대 느티나무아카데미가 진행하는 ‘서울드로잉’ 과정에 등록해 1기 수업을 마쳤다. 이제 창작 프로젝트를 시작할 타임이다.

사진 : CC코리아(http://www.flickr.com/photos/wowcckorea/6793059961). CC BY.

#3.

이름부터 정했다. ‘어슬렁의 여행드로잉북-동유럽과 지중해’. 이름처럼 동유럽과 지중해 지역을 여행하며 본 것들을 담아 책을 내겠다는 거창한 프로젝트다. 허나, 현실은 현실. ‘돈’을 모아야 했다. 돈 많은 누군가를 찾아가 ‘내가 이런 거 해보려니 후원해주시오’라고 말하면 선뜻 지갑을 열어줄까. 어림없다. 그래서 내게 맞는 후원 방법으로 눈을 돌렸다. 이른바 ‘크라우드 펀딩’이다. 우리말로 품앗이 후원이라고 할까.

이런 후원을 도와주는 텀블벅에 ‘어슬렁의 여행드로잉북‘ 프로젝트를 등록했다. 취지를 설명하고, 마음에 드는 사람은 금액별로 자유롭게 후원하면 된다. 후원금을 돌려주는 방식도 색다르다. 받은 돈을 돌려주는 대신, 책이나 직접 그린 엽서를 주거나 책에 후원자 이름을 넣어주는 식이다. 돈이 아닌 다른 ‘가치’로 되갚는 셈이다. 이거 괜찮은걸.

동유럽과 지중해를 30일 동안 돌아보기로 했다. 110만원을 목표 금액으로 정했다. 제대로 모일까. 결과는 뜻밖이었다. 모두 47명의 후원자가 129만9천원을 밀어줬다. 절반쯤은 아는 이름이었지만, 나머지 절반은 전혀 모르는 이들이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 내 계획을 믿고 선뜻 지갑을 열다니, 낯설고 신기한 경험이었다. 아무튼 준비는 끝났다.

#4.

9월16일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리는 ‘글로벌 CC 서밋’을 신호탄으로 삼기로 했다. 폴란드를 시작으로 체코, 헝가리, 오스트리아, 그리스, 터키까지 30일을 알차게 어슬렁거렸다. 낯설고 매혹적인 삶과 풍경이 이어졌다. 이들 풍경은 눈을 거쳐 손으로, 종이로 옮겨졌다. 혼자 그리고 구경하면 제대로 된 프로젝트가 아니잖나. 후원자들에게 엽서도 부치고, 여행 일지도 텀블벅 프로젝트에 틈틈이 올렸다. 응원 목소리가 바다를 건너 날아왔다. 이런 경험, 언제 또 해볼 수 있을까.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니 시작이었다. 책을 낼 차례다. 모금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지명도도 없는 작가에다 분량도 적은 드로잉북을 어떤 출판사가 순순히 내줄까. 그래서 방향을 틀었다. ‘독립출판’이란 게 있더군. 직접 책을 만드는 거야. 다행히 이런 독립출판인들을 위해 책을 만들고 판매해주는 소규모 책방들이 더러 있었다.

올해 2월 ‘동유럽과 지중해’ 책을 냈다. 책 200권을 찍어 후원자에게 50여권을 보내고, 지인들에게 50권 정도를 팔았다. 나머지 100여권은 작은 책방 10여곳에 내걸었다. 반응이 썩 나쁘진 않은 눈치였다. 다행이었다. 후원자들을 모시고 작은 파티도 열었다.

#5.

잊지 않았다.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계기 말이다. 직접 아티스트가 돼 창작물을 내놓고 널리 나누는 것 아니었던가. 그래서 책을 모두 내놓았다. 원화를 사진공유 서비스 플리커에 올리고, 책은 PDF 파일로 무료로 공개했다. “그냥 조건 없이 가져다 쓰세요. 단, 출처만 밝혀주세요.” 책과 그림엔 모두 ‘저작자 표시’(BY)의 CCL 조건을 내걸었다. 그린 이가 ‘어슬렁’이란 점만 밝히면, 그림을 그냥 가져다 쓰거나 일부만 잘라 써도 되고 심지어 다른 이에게 되팔아도 상관 없다.

홈페이지도 열었다. 이 일련의 즐거운 실험을 혼자 알긴 아까웠으니까. 책이나 원화를 내려받는 방법과 종이책 파는 곳, 또 다른 실험 준비 기록도 꼼꼼히 넣었다. 널리 가져다 쓰세요. 원작자만 밝혀주시고.

#6.

책을 내고 돈 받고 파는데, 웹에선 무료로 내려받게 했다. 이러면 종이책이 팔릴까. 다들 무료로 내려받아 보려 할 텐데.

어차피 상관 없었다. 애당초 돈 벌려 시작한 일이 아니잖은가. 그 대신 내 그림이 널리 퍼지고, 변형되고, 새로운 창작물의 질료가 된다면 미션 클리어다. 무엇보다 이 과정 전체가 즐겁고 신명나고 신기한 체험이었으니, 됐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전화 한 통이 불씨였다. “여보세요, ‘동유럽과 지중해’ 드로잉북 펴낸 어슬렁씨 되시죠?” “네, 전데요.” “저흰 ○○○ 뮤지컬을 준비중인 기획팀인데요. 뮤지컬 포스터에 어슬렁님 그림을 넣을 수 있을까 해서요?” “뮤…뮤지컬이요? 하핫.”

이상했다. 내 허락 받지 않아도 출처만 밝히고 쓰라고 표시해뒀는데, 왜 굳이 전화를 해서 재차 확인하고 허락받으려는 걸까. 아무튼 겸사겸사 만나서 차도 마시고, 수다도 떨고, 뮤지컬 VIP 관람권도 얻었다. 그렇게 뮤지컬 포스터 배경에 내 그림이 깔렸다. 내 창작물이 2차 창작물로 거듭났다. 이 순간에도 내 그림이 네트워크를 타고 돌아다니며 어디선가 또다른 창작물로 거듭날 지도 모를 일이다. 뿌듯.

#7.

이걸로 끝난 게 아니다. 그림은 첫 시도일 뿐이다. 세상에 창작 활동이 그림 그리는 것 뿐인가. 두 번째 실험도 이미 시작했다. 이번엔 ‘작곡’에 도전해볼 참이다. 이미 공부도 접어들었다. 강좌를 신청하고 같은 팀끼리 밴드도 결성했다. 짜잔~ ‘오후에 비상구’. 간지 나지 않은가. 좀 있으면 ‘기타리스트 어슬렁’을 만나볼 수 있을 게다.

개인이 일상에서 소소하게 창작을 해보는 실험도 진행중이다. ‘컴 먼데이 책마실’ 프로젝트다. 일주일에 한 번씩 모이는데, 각자 창작 목표를 정하고 그걸 실천하는 거다. 거창할 것 없다. 우리 동네 사진 찍기, 독후감 두 줄 쓰기 이런 식이다. 원대한 목표를 정하고 긴 호흡으로 열심히 달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소하지만 명료한 목표를 정하고 스트레스 받지 않고 실천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 아닌가.

앞으로도 직장을 다니고 싶은 생각은 없다. 소소한 프로젝트 언저리를 어슬렁거리며 후원도 좀 받아볼 생각이다. 돈도 좋지만, 필요한 물건을 직접 후원해주면 더 좋다. 생계형 후원 말이다. 책이나 드로잉 용품도 주시면 감사히 받고, 도장이 꽉 찬 커피전문점 쿠폰도 환영이다. 고양이 사료를 보내준다면 우리 동네 길냥이에게 대신 밥도 줄 수 있다. 관심 있는 분은 위시리스트를 참조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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