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영준(38) 연구원은 수화로 말했다. 통역해줄 이를 따로 모셨지만, 이야기의 틈새를 오롯이 채우진 못했다. 수화엔 조사가 없다. 단어만 이어진다. 그의 말이 손끝에서 뚝뚝 떨어질 때마다 조사가 부스러기처럼 흘러내렸다. 비장애인과 청각장애인의 대화는 이렇듯 종종 단절된다.

그래서 새삼 놀랐다. 오영준 연구원이 박사학위를 받기까지 넘었을 고개들이 얼마나 험난했을까.

오영준 연구원은 청각장애인 국내 박사 1호다. 그는 2월17일 숭실대학교 대학원 미디어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는다. 휴먼컴퓨터(HCI) 시스템을 10여년간 연구한 끝에 이룩한 결실이다.

청각장애인 첫 국내 박사라니, 믿기 어려울 만도 하겠다. “2000년대 초반, 외국에서 농학(Deaf Studies)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례가 있긴 했지만, 순수하게 국내에서 공부해 박사학위를 받은 청각장애인은 제가 처음이라고 알고 있어요. 더구나 자연과학 계열로 받은 사례는 아직 없습니다.”

비장애인에겐 낯설지 않은 ‘박사’ 호칭이 청각장애인에겐 그리 도달하기 어려운 자리일까. 오영준 연구원이 밟아온 길이 그 고단한 여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한두살 무렵이었다고 들었어요. 기억조차 없는 영아 시절, 사고가 났어요. 넘어졌는지 어디에 부딪혔는지도 확실치는 않습니다.” 오 연구원은 소리를 배우기 전부터 세상의 소리로부터 단절됐다. 사실상 선천성 청각장애인이나 다름없었다.

청각장애인 대다수는 수화로 의사소통을 한다. 수화는 한국말이나 영어 같은 언어와 구조가 완전히 다르다. 말 그대로 제3의 언어다. 이 언어로 소통하는 청각장애인에겐 한국말도 제2외국어나 다름없다. 기본적인 이해력이 딸리게 마련이다. 더구나 청각장애인 환경에 맞는 교과과정을 갖춘 농학교를 졸업하고 일반 대학교에 진학하기란 쉽지 않다.

힘겨운 시간이 시작됐다. 친구들이 읽고, 듣고, 배우는 시간을 오 연구원은 똑같이 누리지 못했다. 어릴 적 교과서는 형, 누나였다. 눈치껏 어깨 너머로 형, 누나를 따라하는 게 배움의 시작이었다. 진도를 따라가려면 그 만큼 더 노력할 도리밖에 없었다. 초등학교땐 공부를 포기할까 생각도 했지만,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렇게 초·중·고교를 농학교에서 마치고 대학 문을 들어섰다.

하지만 오영준 연구원의 한글 어휘 구사력은 비장애인과 비교해도 거의 차이를 느끼지 못할 정도다. “어릴 적부터 만화책을 많이 봤어요. 직접 문장을 쓰는 훈련을 쉬지 않고 했지요.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나 수화 내용을 글로 바꿔보는 식이었죠. 마치 비장애인이 혼자 중얼거리듯, 저는 글로 혼잣말을 했어요.” 그렇게 오영준 연구원은 사회로 나서기 위한 첫 고개를 넘었다.

그는 IT 관련 공부를 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고교를 졸업하고 한국폴리텍대학에 입학한 뒤, 대학 3학년때 성공회대 정보통신학과로 편입했다. 졸업 후엔 숭실대학교 대학원 문을 두드렸고, 2003년 ‘수화번역 시스템’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단어와 문장을 아바타가 수화로 자동 번역해 보여주는 시스템이었다.

“석사논문이 공개되자 이번에는 카이스트에서 공동 연구 제안을 해 왔어요. 이를 계기로 2004년부터 4년 동안 카이스트에서 연구원으로 일했죠. 제 아이디어를 응용해서 카이스트가 고용 현장에서 농아인에게 자동 번역을 해주는 시스템을 내놓기도 했어요.”

2006년 8월에는 카이스트 인간친화 복지 로봇시스템 연구센터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청각장애인이 직장에서 동료와 보다 손쉽게 의사소통하도록 문자를 수화로 번역하는 가상 로봇을 만드는 작업이었다. 같은 해에는 한국도로공사가 이를 활용해 ‘하이아바타’ 서비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하이아바타’는 한국도로공사 고속도로 실시간 방송중계 화면을 아바타가 수화로 실시간 통역해주는 서비스다.

카이스트 연구원 생활을 마치고도 오영준 연구원은 책을 내려놓지 않았다. 2008년 다시 숭실대로 돌아와 박사학위를 목표로 연구를 계속했다. 4년여 연구 끝에 지난해 12월 ‘장애인을 위한 다중 카메라 기반의 지능형 공간’을 주제로 논문을 냈다. 카메라와 센서, 증강현실(AR) 같은 기술을 이용해 장애인이 물건을 인지하고 장애물을 피해 이동할 수 있는 지능형 시스템을 다뤘다. 이 연구는 노인용 복지형 스마트 홈 시스템이나 실내 CCTV 시스템, 실내 로봇 이동 시스템 같은 다양한 분야에 활용될 수 있다.

“학교에서 따로 청각장애인을 위해 지원해준 건 없었습니다. 수업시간에 교수님이 얘기하는 걸 이해하지 못해서 친구 노트를 보며 모르는 걸 물어보고, 친구가 메모해주면 그걸 바탕으로 독학으로 부족한 공부를 채웠어요. 주변 친구나 교수님과 의사소통은 대부분 e메일이나 인스턴트 메신저로 했어요. 사실, 쉽진 않았습니다.”

오영준 연구원이 박사논문 주제로 연구한 ‘장애인을 위한 다중 카메라 기반의 지능형 공간’(위)과 한국도로공사 ‘하이아바타’.

오영준 연구원은 국내 웹이나 모바일 환경에 대해서도 아쉬움을 드러냈다. “비장애인은 웹에 게시된 정보에서 크게 불편을 못 느낄 지 몰라도, 청각장애인에겐 내용이 어렵고 너무 복잡합니다. 예컨대 창을 둘로 분할해서, 한쪽 창에서 텍스트를 클릭하면 다른 창에서 해당 내용을 수화로 알려주면 좋을 텐데요. 일본에선 그런 시도를 하고 있어요. 모바일뱅킹도 농아인들은 거의 안 씁니다. 결제를 하려면 인증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절차를 이해하기 어렵고 인증번호를 넣는 과정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오영준 연구원은 장애인 사용성 테스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제품 설계 단계에서 장애인에게 직접 써보고 의견을 수렴하면 불편함이 훨씬 줄어들 겁니다. 대기업 제품들도 정작 써보면 장애인 접근성이 많이 떨어지는 편입니다.”

후배 청각장애인에 대한 당부도 남겼다. “대학에 진학한 후배 농아인들을 보면 대부분 사회복지학이나 인문계를 선택하는데요. 자연과학 분야에도 많이 진출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정부도 농아인들이 다양한 기술을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데는 부족해보입니다. 일본은 산학연계를 통해 농아인들도 산업디자인이나 기술 연구원으로 진출하는 기회를 다각도로 제공하고 있어요. 물론, 농아인 스스로 연구 분야를 넓히는 게 우선이겠죠.”

10년 넘는 시간을 오롯이 학위를 따는 데 바쳐서일까. 오영준 연구원은 따로 취미 생활을 즐길 여유를 갖지 못했다. 그래도 한가할 땐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무작정 시내를 돌아다니곤 한다. 그렇게 일상을 구경하는 게 즐겁단다. 요즘엔 페이스북 쓰는 재미도 쏠쏠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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